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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6

아빠는 나의 검은 꽃 그림을 칭찬해 줬어. 빨간 꽃, 노란 꽃, 분홍 꽃은 많이 봤는데, 검은 꽃은 처음 본다고 했어. 이야 기발한데? 아빠는 이 검은 꽃이 제일 멋지다! 라며. 유치원 시절 이야기야.



창고에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이라는, 아빠 측근이라면 필연적으로 익숙할 문구가 새겨진 가방을 꺼냈어. 해병대 모자 (사실 귀여운 트루퍼 햇), 저금통, 병역수첩, 공책이 나왔지. 가방 바닥에는 신문 세 부가 접혀 있었어.

해병대 가방 해병대 가방

맨 위의 신문을 펼쳐 보고 눈물이 났어. “보고싶어요, 오빠가..” 라는 제목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보도였어. 하루 종일 바닷가에 앉아, 저 바닷속 어딘가 있을 오빠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다던 단원중학교 학생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어. 나머지 두 신문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인파가 서울시청 앞을 빈틈없이 메꾼 2009년의 사진이 가득 담겨 있었어. 왜 아빠를 슬프게 한, 쓰라린 죽음의 시점을 간직한 걸까. 아빠의 죽음을 마주하는 지금, 다른 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신문을 챙겼을 아빠를 상상해. 이 아픈 마음 잊지 않으려 함이었을까. 슬프지만 그러기에 소중했을 마음을.

나도 그래. 슬프지만 그래서 소중한 마음을 이젠 이해해. 아빠가, 의지할 사람이, 날 응원해 주고 걱정해 주는 이가 사라져서, 내가 외로워서 슬픈 게 아니야. 내 세상의 큰 부분을, 고로 나의 커다란 일부를 잃은 아픔이야. 아빠는 그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진짜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거든. 나 자신을 아빠에게서 찾았고, 아빠를 나 자신에게서 찾았어. 세상에 드러난 아빠의 존재의 그림자, 그것이 이 슬픔이기에. 이 슬픔도 귀한 나의 일부야.

물리학은 말해, 시간과 공간은 하나이고,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과거가 단순히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속 아빠의 좌표에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아빠를 향한 내 마음은 그대로라서, 죽은 이를 계속 사랑하는 이 신기한 마음이 시간의 선형성을 초월해 우리를 엮는 무언가가 있다고 증명하는 듯해.

이토록 순수하고 온전한 애정과 사랑을 허락해 준 아빠의 존재에 무한히 감사해.



나의 붉고 노란 다른 꽃은 많은 칭찬을 받았는데, 나의 검은 꽃을 칭찬해 준 건 아빠가 유일했어. 아빠는 다른 이가 봐주지 않는 나의 구석까지 봐준 거야.

아빠가 나에게 준 모든 것, 똑 닮은 손과 귀와 발, 멍때리는 표정, 책에 대한 애정, 호기심, 모험심, 칭찬, 무한한 믿음과 응원, 철학, 미묘한 팔자걸음, 고집, 해병대 트루퍼 햇, 그리고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빠는 늘 내 곁에 있어. 그래서 난 슬퍼도 외롭지 않고 좌절하지 않아.

2003년 양떼목장 가족여행

사람들은 아빠가 죽었다고 하지 않아. 대신, 아빠가 떠나셨다고, 돌아가셨다고 해. 어디로 떠났다는 걸까? 어디서 왔길래, 그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까.

얼마 전 읽은 책[1]에서 그러더라. 죽음은 친구와 한참 재밌게 놀고 있는 와중에 엄마가 "애아, 와서 밥 먹어라" 하는 거라고. 엄마, 즉 모태로 돌아가는 것. 죽음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이라고. 고향과 같은 어느 곳으로 돌아가 아빠는 쉬고 있을까. 편안할까, 고요할까.

아빠 친구들이 그러는데, 내가 아빠의 큰 자랑이고 사랑이었데. 아빠에게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나도 알아. 나도 친구들에게 아빠 보고 싶다고, 울 아빠 이만큼 멋지다고, 자랑하고 다녔거든. 아빠는 영원히 내 자랑이야. 나도 계속 아빠의 자랑이 될게.


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