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KOREA

2023-11-19

한국 올 때마다 난 바뀌어 있다. 한국도 바뀌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언제나 늘 이쁘고 머찌다. 열심히 산다.

올해 한국 방문 관광 코스 리스트:

  1. 퍼스널 컬러 진단
  2. 템플스테이
  3. 건강검진
  4. 싱숭생숭 생각 가득

1. 퍼스널 컬러 진단

요즘 젤 핫한 한국 관광 아이템 머다? 퍼컬 진단 동생이랑 받으러 갔다.

나는 곰돌이 브라운 성애자이자 셀프진단 99% 확신의 가을딥 이었다.
부족한 1%를 채워줄 전문가를 만나러 갔다. 나의 확신을 완벽하게 해줄 그를 찾아.

진단 결과는
두둥

personal color diagnosis

1등: 여름 라이트
2등: 여름 뮤트
최악: 가을 딥

지혜님은 명도가 가장 중요한 타입이라 밝게 입어주시는 게 가장 중요해요~
하늘색, 연보라, 이런 파스텔 톤 가장 좋구요~
반차 쓰고 싶은 날이나 아파 보이고 싶은 날,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날엔 검은색 갈색 입어주시면 돼여 ^^

듀듕,,,

L(・o・)┐

L╏ º □ º ╏┐

10대 20대 초반에 파스텔 톤 좀 좋아하다가 20대 중반에 들어 나의 색깔을 찾아간다는 게 검정과 갈색이었는데 말이다.

My life's been a lie.
내 인생은 거짓이었어.
내 취향을 도둑맞은 느낌이다. 내 안목도 더불어.


나의 반응: 비탄의 다섯 단계


첫 번째 단계. 부정.

진단을 부인하고 부정하다.

아닌데? 나 검정색 갈색 잘 어울리는데?
아닌데? 나 파스텔 안 어울리는데?

아뉜데? 짤

새로운 걸 시도해 볼 좋은 계기라는 점은 인정한다. \

두 번째 단계. 좌절.

여름 라이트 쇼핑몰이라는 곳은 죄다 하늘하늘 블라우스 여리여리 청순.
'청순을 가진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뢰?

세 번째 단계. 타협

그래 희끄무레한 니트 주문.

웅.. 잘 어울리넹.
더 주문해야지.

네 번째 단계. 우울.

검정색을 입은 내가 너무 못생겨 보이길 시작한다.
희끄무레한 옷들 배송이 너무 늦어서 슬프다. 옷장에 가득한 검정색좀 그만 입고 싶다.

다섯 번째 단계. 수용.

웅.. 나는 확실히 밝은 색이 잘 어울린다. 하늘색 셔츠와 아이보리 니트에만 손이 간다.

(그치만 분홍색 립과 핑크색 아이섀도우는 거부.)


btw 페이스북 구석에서 찾은 9학년 베스트 컬러의 나.. 큭

me in 9th grade
Jeehye, 2009

결론

믿음이란 진짜 무섭다. 믿음은 견고한 버블로 나를 둘러싼다.

심리학/인지과학 전공자라면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을 Confirmation bias/인지편향.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인간의 버그를 뜻한다.

이 편향을 넘어서는 믿음, 확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뢰할 만한 믿음.
예를 들어서 내가 가을 딥이라는 믿음. 살며 쌓아온 경험과 나의 안목이 주는 확신.

하지만 보아하니, '가을 딥'이라는 믿음에 눈이 멀어 그에 상반하는 정보를 무시해 왔다.
지금은 보이는 칙칙해지는 낯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는 거.

그러다가, 믿음이 흔들리니 안보이던 '어울림' 이 보이기 시작한다.


최근에 정말 정말 재밌게 읽은 BITCH. 번역본 제목은 암컷들: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책 맞음. 교양 과학 서적입니다.)

생물학은 오랫동안 (지금도) 다윈의 고정관념의 덫에 걸려 있(었)다.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며, 진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난자와 정자에서 시작된다.” - 이기적 유전자 by 리차드 도킨스). 암컷의 주도적인 행동이 목격될 때면 그 데이터를 outlier 라며 버린다던가, 주도적인 암컷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내러티브를 기어코 갖다 붙였다. 이 편향을 극복하고 생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현대 생물학의 혁명과 그를 주도하는 멋진 학자들에 대한 책이다.

(참고로 정말 추천하는 책이다. 교양도 쌓고 무엇보다 찢어지게 재밌다.)


퍼스널 컬러는 똥색 입어도 나만 손해 보는 거지만 과학, 종교, 정치, 이런 곳에서 믿음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그래서 너를 규탄 혹은 교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너무 많다. 이제껏 쌓아온 Narrative 에 갇혀 눈 앞에 있는 진실을 보질 못한다.

가까이 내 살 닿는 곳에는 어떤 믿음이 군림하고 있을까? 나의 믿음은 내 삶을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고 제약하고 있을까?
음... 이 사람은 이럴 거고 저 사람은 저럴 거야, 라는 게 가장 많이 떠오른다.

퍼스널 컬러 진단으로 시작해 삶에 대한 사색으로 끝.
할 일 많은데 난 왜 이러고 있나.


book quote
by 실비아 플라스, from 글 쓰는 여자의 공간


2. 템플스테이

인천 전등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루 했다. 체험형 vs. 휴식형 중 휴식형을 했다.

전등사 풍경

집에서 가까웠고 무엇보다... 예약 가능한 곳이 여기 휴식형밖에 없었다.
서울 내의 사찰은 전부 booked out. 전등사도 체험형은 예약 마감이었다.
한국에서 전투적으로 살게 되는 이유인가 보다. 전투적으로 하지 않으면 뭘 할 수가 없다.

  1. 사찰복 증말 예뻣다. 갖고 싶었다. 사찰에서도 피어오르는 물욕.
  2. 고양이가 귀여웠다.
  3. 새벽해 뜨기 전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가 dreamy 했다. 해 뜨기 한참 전, 자욱한 안개 속에서 목탁 소리와 불경 읽는 소리에 한참 멍때렸다.
전등사 새벽
새벽의 전등사.

일상에 치이다 가면 더 좋을 것 같다. 다음엔 체험형을 해보고 싶다. 휴식형이라면 적어도 사흘은 있고 싶다.



3. 건강검진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정말 최고이시다.

무료 검진 + 돈 주고 하는 정밀 검진 했다.

결과 highlights:

  • 몇 년 전 겪은 무월경으로 인한 골감소증은 사라짐. 골밀도 정상.
  • 비장이 큼. 피검사 보고 담에 한국 오면 추적검사 필요.
  • 위내시경 중에 용종 제거. 조직검사 결과 만성위염. (1도 안놀라움)
  • 위내시경 수면마취 꿀잠. 이래서 프로포폴 중독되는 건가.
  • 인바디: 근육량 늘려야 함 호호
  • 그 외에는 매우매우 건강!!!

이야 한국 참 조타!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정말 최고이다.



4. 싱숭생숭 나의 인생 후후

어느새 한국에서 산 날이 인생의 1/3로 줄어들고 있다. (한국에서 약 10년 살음)


이번에도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필리핀 고등학교 친구들 (나와 같이 어렸을 때 해외로 나간 친구들)
홍콩 대학생활 때 만난 친구들 (+ 한국에서 쭉 살다가 대학교를 유학 간 친구들)
한국 인턴 중 만난 친구들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란)

지금은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다.

"해외로 나갈 생각 없어?" 라는 질문에 답은 다양했다.

  • 원하면 나갈 수도 있긴 한데... 한국에서 누리는게 너무 많아서, 해외로 나가려면 포기해야 할게 너무 많아서 (가족, 친구, 집, 차) 그냥 여기 한국에서 있으려고.
  • 미래엔 해외에서 일하고 싶은데, 지금은 한국이 좋아. 직장도 있고 친구도 있고.
  • 너무 멀진 않은 미래에 해외 대학원 갈 생각이야.
  •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 언젠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 해외로 나가고 싶은데, 꿈이 있는데, 고민이 많이 돼.
  • 여기 한국이 제일 좋아!

전엔 다들 붕 떠 있고 방황하는 과정이었는데
한둘씩 자리를 잡아간다.
몇은 결혼도 하고, 가끔은 애도 낳고.

나는 안정감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고, 안정감에 대해 평소에 딱히 생각하지도 않았다.
난 계속 모험하며 살 건데 주변에서 하나둘 정착하니까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
근데 또 이야기 나눠보면 다들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


나에게도 한국 너무 편하고, 좋은 친구들도 있고, 참 좋은데
결정적으로 내 집이 아니다. It doesn't feel home.

그렇다고 베를린이 feels home 한 것도 아니다.

내 집은 어디에? 


한국에서 지낼 땐 외롭고 답답하다.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분명하다.
근데 독일이라고 그 공백이 채워지는 건 아니다.
그와 다른 것이 채워진다.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성장한다.

내 결론은
어차피 한국에서도 힘들 거고, 타지에서도 힘들 거면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힘들래.

생각해 보면 난 지금 이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한다.
이럼 된거 아냐? (ᅌᴗᅌ✿)


인생에 대한 고찰 없이는 블로그를 쓸 수 없는 병에 걸린 나는 이렇게 또
overthinking 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Tschü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