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이스케이프 2019

2019-08-17

어디든 가고 싶었다. 비행기표가 저렴했다. 와 버렸다! 또 혼자!

대학원 가기 전 명분상 백수이지만 매일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지친 나를 쉬게 하고 싶었다. 대학원 가면 고생 시작일 텐데, 이 황금 같은 백수기를 줘도 활용 못 하는 나란 바보…


가장 인상깊은 호치민의 장면들

Day 1. Eat where the locals eat.

아침에 (차 소리가 아닌) 새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는 후기를 보고 외딴곳의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안지혜는 도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가진단 때문이다. 도착했는데 너무 외딴곳이라 벌써 답답하다, 며칠 있다가 시내로 옮겨야지~! 안지혜는 구제 불능이라는 두 번째 자가진단을 한다.

배가 너무 고파! 집 앞 쌀국수 로컬 음식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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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고 멋진 solo traveler가 될 테야!!!.. 일단 들어왔는데 어쩌지. 비좁은 식당의 두 테이블은 거의 만석이고 메뉴판은 (당연히) 베트남어. Pho는 알겠고 그 앞뒤에 붙은 건 뭐지? 그냥 주인장한테 가서 ‘포!’ 외쳐?… 우물쭈물, 어색어색 발 동동거리고 있는데, 한 커플이 여기 앉으라며 말을 건다. 여자는 남자에게 베트남어로 뭐라고 하고, 남자는 어설픈 영어로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본다. ‘포?’ ‘예스 포.’ ‘왓 카인드? 위 해브 치킨, 비프…’ ‘치킨 플리즈.’ 뭐라고 하면 돼? 포 으어 가.

드디어 당당히 주인 이모에게 ‘포 으어 가!’ 를 주문했다. 후후.

차가운 차, 채소, 토핑은 무제한 & 셀프. 길다란 풀때기는 톡 톡 토막내서 넣고 고수는 취향것 (= 듬뿍). 소스도 취향것 알아서. 어색한 외국인 도와주는 착한 사람들 흥하세요! 부자되세요!

‘왜 혼자 여행해?’ ‘그냥 혼자 왔어. 나 어디서 왔게?’ 물어보니 자기는 베트남 중부에서 왔다고 한다. 아니 너 말고 나 물어본건데.. 그때 갑자기 반대쪽에 앉아있던 손님: ‘당신은 호 혹시 한쿡사람.. 입..입니카?’ ㅋㅋㅋㅋㅋㅋㅋ 한국말 공부한다던, 한국 드라마 좋아한다던 친구였다.

3만동(1500원)짜리 포. 진짜 맛있었다. 진짜 진짜. 맛있어… 향은 강한데 자극적이지 않다고 할까? 플러스, 새로 만난 템포러리(temporary) 친구들과 먹는 재미


Day 2. Strollin’ through the city.

비가 온댔는데 안 온다. 시원하고 선선해 기분이 좋다. 한국도 여기도 맨날 비온다면서 안와? 이쯤되면 비 안온다는데 비 오면 사람들이 불평하니까 비가 올진 모르겠지만 에잇 일단 온다고 하자 아닐까?

낮에는 카페에서 일 하고, 저녁 쯤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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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랜드마크) 인민위원회 청사에서부터 발 가는 데로 떠돌았다. 오래 전 프랑스 건축가가 호텔로 지었고 지금은 시청이다. 노을 지는 하늘에 감탄하며 이 앞을 지나치는데 마침 불이 딱 들어왔다. 하늘의 노랗고 푸르고 붉은 빛과 건물의 노란 불빛이 멋지게 어우러졌다. 시청 앞 뻗어있는 광장엔 분수가, 그 주위엔 알콩달콩 연인과 뛰어노는 애들이 있다. 애들을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 •̀ᴗ•́ )و ̑̑) 여행자의 여유 때문인지, 애들 웃고 뛰노는게 예뻐 보이긴 하더라. 근처 바에서 맥주 한잔 할까 했지만 카메라가 너무 무거웠고 어깨가 쑤셨다. 내일, 카메라를 두고 가벼운 몸으로 맥주 한잔 하러 와야겠어.


Day 3. Disturbing and devastating – War Remnan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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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박물관. 왜 사진이 이딴 것 밖에 없냐면 전시회가 너무 마음 아프고 머릿속이 가득차 사진 찍을 생각도 못하다 저 총을 보고 옛날에 서든하던 생각 나서 잠시 낄낄거리며 찍었기 때문이다. (노답 ㅋㅋㅋㅋㅋㅋㅋㅋ)

알지만 믿기지 않는 역사가 진짜라고 확인사살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2살 11살 23살 아이들이 총에 맞아 죽고, 고의로 살포한 독극물에 피복되어 몸과 삶이 망가지고 몇 세대에 걸쳐 기형아가 태어나고, 전쟁은 17년이었고 고통은 현재까지 진행 중 이라는 것. 피해자는, 그리고 가해자는 통계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었다는 것. 수백만의 피해자는 수백만의 세계였다는 것.

They just didn’t know better, right? Or maybe not. I do not know.

관람 이후 내 멘탈은 너덜너덜 해졌고 남은 호치민 여행은 몇 배로 풍부해졌다.


Day 4. The most perfect day in a long time.

아주 오랜만의 더할나위 없는 하루! 점심엔 호텔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반미를 먹고 일을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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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오페라 하우스 – A O Show. 나 완전 반해버렸어! 베트남 시골 전통과 현대 도시 생활에 대한 스토리 텔링이다. 유머 + 대나무 소품 + 라이브 음악 + 액션 → 보는 내내 내 얼굴: ˖(⁰ᐞ⁰)˖. Lune Produciton 에서 미리 예매하면 된다. 호치민, 하노이, 호이안에 각기 다른 공연을 한다고 하네. 다음에 하노이에 가게 된다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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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oustic Bar. 라이브 음악이 고파 찾아갔다. 미리 요약: 심심할때 나쁘진 않은데 간다면 좀 늦게, 10시쯤 사람 좀 빠질때 가세요.

페이스북에 8시 공연 시작이라는데 8시 15분쯤 도착했더니 밴드는 안 보이고 사람 드글거리는 개미굴이다. 운 좋게 스테이지 옆 바 테이블 구석에 자리를 확보하고 호치민 치고 더럽게 비싼 맥주 (약 5천원)를 홀짝이며 기다린다. 기다린다… 후. 지쳐 미쳐 짜증 살짝 날 때쯤 밴드 등장! ..사운드 테스트를 더럽게 길게 한다. 9시 좀 넘어 마침내 공연 시작. 꽉찬 바 구석, 혼자 맥주 한잔 아껴가며 한 시간을 서 있는다는 건 고문이야. This better be good.

아.. 구려. 첫번째 밴드 별로. 내 표정은 아마 썩어있었을 것이다 (죄송). 오기로 버티며 두 번째 밴드 살짝 들어보고 구리면 바로 탈출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벗뜨 다행이도 두번째 밴드 진짜 즐거워 마구 춤추며 놀았다! (Acoustic band 라는 여기 고정밴드). 여러 보컬 세션이 돌아가며 공연한다. 끼를 주체 못한 관객들은 스테이지로 올라와 무대를 장악해버린다. ㅋㅋㅋㅋㅋ 두번째 보컬은 은발 할아버지 (윗 사진). 멋짐이 폭팔했다.!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넘 멋져 엉엉 우리 할아버지 해주심 안될까요? 혼자서 신나게 흔들흔들 거리다 옆에 있던 싱가폴 여행객들이랑 친구먹고 술도 얻어마시고 좀 놀다가 11시 반쯤 숙소로 돌아왔다. 바로 기분 좋게 기절해 꿀잠잤다.

글로벌 동포들과 어깨 나란히 두둠칫 노는 곳. 내가 호치민에 산다면 굳이 찾진 않을것 같지만, 여행하는 나에겐 좋은 기억.


Day 5. Banh Mi.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오직 반미. 별거 없이 카페에서, 호텔에서 축 쳐져 쉬고 싶은 날. 카페에서 일 좀 하고, 동네 산책 좀 하다가 호텔에 와서 그레이 아나토미 (내 최애 미드) 정주행했다. 다섯시 반 쯤 배가 출출해졌다. 트립어드바이저-피셜 “Best Banh Mi in Ho Chi Minh” 을 사러갔다. 마침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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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ynh Hoa Bakery. 여섯시 좀 전인데도 줄을 서있다. 메뉴는 한 가지. 굉장히 바빠보이는 직원이 손가락 두개로 브이를 그리며 ㅇ_ㅇ? 쳐다보길래 ‘원’ 이라며 손가락 한개를 들어보였다. 한 가지 메뉴로 승부를 보는 맛집은 신뢰가 가. 반미 한개랑 편의점 맥주를 사들고 호텔로 돌아와 그레이 아나토미를 틀어놓고 맥주 한모금 크으, 들이킨 다음 반미를 우걱 베어물었다. 와 진짜 맛있다… 진짜… 고기 이것저것 소스 이것저것 다 넣은 맛인데 진짜 맛있다. 매일 먹으면 병 걸릴것 같지만 맛있다. 아 먹고싶다…

담백한 밀가루 맛, 바삭한 바게트의 식감, 동남아의 향과 풍미가 어우러진 반미는 (맛+식감+향 다 잡은) 완전식품이다. 계란이 완전식품이라고? 똥 싸고 있네!


Day 6. 베트남 피자, 혼책맥, 루프탑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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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p Me In – 잘 꾸며놓은 분식집 같은 곳. 번역하면 엄마의 부엌. ‘베트남 피자’라고 불리는 길거리 음식인데 길거리에서 파는것보다 이게 더 맛있어 보인다. 비유하자면 길거리 떡볶이 vs. 즉석떡볶이? 또 다시 반해버렸다..! 혼자 눈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면서 싹싹 긁어 먹었다. 한 입 베어 물때마다 베이스가 바삭하게 뜯어지고 그 위에 라이스 페이퍼의 쫄깃함, 견과류의 고소함 & crunch에 고기까지.. 저 피넛베이스 소스까지 뿌리면 펄☆펙. 아 먹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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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낮책맥 @ Pasteur Street Brewing Co. 오후 4시쯤 찾은 생맥주 브루어리. 조용하지만 너무 조용하지 않고, 사람이 어느정도 있지만 북적이지는 않았다. 호치민 치고 굉장히 비쌌지만 (110,000동, 약 6,000원) 책맥하기 딱 좋은 분위기라 이 정도면 여행자의 여유로 기분 좋게 받아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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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Secret Garden – 루프탑 식당. 미흡한 메뉴선택 탓일까 음식은 쏘 쏘. 노을을 보고 싶었는데 구름이 어두워지는 것만 봤다. 하지만 하늘 아래 식당에서 하루를 마무리 한거 좋았어. 나 자신을 내가 아껴주는 느낌이야.


Day 7. Spa Packange and Sauna.

뽀송하게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마지막 날 마사지를 예약했다.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칭송받는 Cat Moc Spa에서 Spring Stream 이라는 두 시간 패키지 선택. 풋 케어 30분, 허브 스팀 사우나 30분, 아로마 오일 마사지 60분.

.. 사우나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걸까. 처음엔 땀이 뚝뚝 떨어지는게 이 맛이구나 싶었다. 근데 10분정도 지났을까, 내가 덥고 습하고 비좁은 곳(이건 마치 홍콩? I like HK tho) 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윽. 나가고 싶어!! 그냥 꺼내달라고 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에 끝났다. 도데체 뭐가 좋다는 거지. 김치의 맛을 모르는 외국인, 청국장의 맛을 모르는 어린애 같은 맥락인가? 난 모르겠다.

마사지는 시원했지만 새로 태어난 기분까진 아니였다. 후기는 참 좋은데, 나랑 궁합이 별론가?




저녁으로 마지막 반미를 먹고 밤 비행기를 탔다 여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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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잡다한 것들:

  • Fine Arts Museum (미술관): 베트남 전쟁 시절 현대미술작품을 주로 전시하는데 굉장히 볼 만함. 프랑스 식민시대에 지어져 건물 멋짐, 특히 창문이 인상깊음. 단점이라면 조명이 구리고 에어컨이 없어 덥다는 점.
  • Independence Palace (통일궁): 옛날 대통령 생활을 엿볼 수 있는데 역사에 무지한 나에겐 큰 감흥 없었음.. 공부를 하고 가야하는 곳 (혹은 역사 덕후들).
  • Golden Dragon Water Puppet Show (수중인형쇼): 시간 남아서 할거 없으면 가도 괜찮. 살면서 저런거 한번쯤 봐두지 뭐. 딱 이 정도?
  • 우체국 & 노트르담 성당: 그냥 예쁜 곳.
  • 뜬금없이 인생 포케 먹고 옴! Poke Saigon Ly Tu Trong 재료도 싱싱해 보이고 양 푸짐, 토핑 무제한. 홍콩이나 한국에서 이 가격으로 절대 못 먹는 포케 퀄리티.

하루 첫 생각이 할 일 리스트가 아니었다. 미래의 집은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의 촉감이 기분 좋다는 것 등 이었지. 나 많이 정신 없었구나. 내가 날 또 다시 몰아부치고 있었구나. 불안일까? 강박일까. 인간관계 및 내 가치에 대한 불안이 사그라든 대신에 일/성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이 찾아온 걸가? 그 덕에 많은 걸 이루겠지 난. 하지만 난 인생을 더욱 살고 싶다. 일과 성취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내 인생을, 나 다운 인생을 더 살아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