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 About death
불안감이 높은 사람은 오히려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의 불안을 안전하게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위협이 허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전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한다.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다 불안이 높은 사람이란 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라는 물음 전에 우선 삶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죽음은 삶의 끝이라 정의할 수 있기에.
삶이란 무엇일까
지구라는 이 우주의 작은 구석에서,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화학자 Lee Cronin은 생명을 두 단어로 정의한다: existence & copying[1], 존재와 복제. 생명은 어떤 물질이 스스로 복제하며 계속 존재하는 현상이다. 존재하며 사라지지 않는, 그리하여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거듭난 것. 그것이 생명이다.
여기서 '사라지지 않는 존재'는 유전자 정보를 뜻한다. 각 개체는 결국 소멸하지만,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유전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그 존재는 계속 이어진다. 삶이란 어쩌면 여러 개체를 통해 지속되는 정보가 각 개체 안에서 풀어져나가는 방식이겠다.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법칙엔 이런 게 있다: 결국엔 더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난다.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entropy tends to a maximum의 해석)
이거 뭔 당연한 소린가 싶겠다. 사실 이 당연한 소리 덕분에 우리는 숨을 쉴 수 있다. 공기 입자가 방 한구석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것보다 고르게 퍼져있는 것이 더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더운 날 아이스크림이 녹는 이유이다. 에너지가 더 많은 (뜨거운) 곳에서 에너지가 더 적은 (차가운) 곳으로 퍼지는 것이 더 있을 법한 일이다.
이 우주에서 더 있을 법한 일이란 더 랜덤하고, 퍼트려지고, 어질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냄새는 풍기고, 촛불은 타고, 별은 핵융합하며 빛난다. 우주는 점점 더 어질러지고 결국엔 완전한 무질서의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을 우주의 heat death, '열 죽음' 이라 한다).
생명체는 점점 더 어질러지는 우주에서 잠시 어질러지지 않고 존재하는 법을 찾아냈다 (Existence). 그 방법은, 단순히 말해 자기 주변을 더 어질러서 내가 어질러지지 않을 꼼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숨 쉬고 배설하는 것이 그 일부이다.
또한, 우리는 DNA를 복제하여 한 종/species으로써 계속 존재한다 (Copying).
고로, 사라지지 않음 (Existence) + 유전자 복제 (Copying) = 생명 (Biology)이다.
그 과정에서 각 개체는 나이가 들고, 노쇠하고,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즉, 우주의 관점에서 더 있을 법한 상태가 된다. 결국 일어날 일, 그것이 죽음이다.
죽음의 시작
그렇다면 생명이 있는 한 죽음은 항상 존재했을까? 아니다, 라고 볼 수 있다.
아주 먼 옛날, 단순한 생명체는 스스로를 분열하여 생식했다 (무성생식). 자신의 유전자를 100% 가진 클론을 만드는 것이다. 이때엔 이 몸이 사라져도 또 다른 "나"가 존재했다.
시간이 지나며 지구가 살기 각박해지고, 생존 및 번식이 어려워지자 두 개체의 유전자를 섞어 다양성과 생존율을 높이는 유성생식이 생겨났다. 이때부턴 새로 만들어진 개체는 나의 유전자를 반만 가졌기 때문에 더는 “나”가 아니다.
고로, 이 몸이 사라지면 나란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유성생식 덕분에 다양성과 생존의 유리함이 생겼고, "나"란 개체의 고유성과 유한함이 생겨났다. 동시에, 죽음이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빠의 절반이다
우리 각자는 고유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다.
우리는 클론을 만드는 대신에 유전자의 반을 물려준다.
그 말은, 나는 아빠의 절반이라는 뜻이다.
또한, 아빠의 일부는 늘 나와 함께 할 거란 것이다.
내가 만약 아이를 가진다면, 아빠의 1/4이 그 아이와 살아가겠지. 그 후엔 1/16, 1/32, 이렇게 점점 흐려져 갈 거야. 우린 모두 서서히 흐려지는 것이야. 죽음이란 그런 걸지도.
죽음엔 논리가 없다
나는 요즘 온통 죽음을 본다. 병원에서, 책 작가 소개 글에서, 노래 가사에서, 뉴스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결론을 내린 한 가지가 있다면 죽음엔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엔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이웃에게 일본도에 찔려 죽은 40대 가장도 있었고, 곧 태어날 딸을 놔두고 교통사고로 죽은 방송국 PD도 있었다.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를 어긴 호텔에 불이 나서, 20대 투숙객은 엄마에게 내 몫까지 잘 살라는 문자를 남기고 죽는다. 헤어지자는 말에 전 남자친구가 찾아와 살해하고, 건축현장에서 알바하던 21세 청년은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삶을 끝내야 할 만큼 삶이 버겁다.
아빠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는 소식을 듣고, 아빠를 모실 만한 봉안당을 방문해본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사진들 사이에 빨간 스웨터를 입은 여자애의 사진이 눈에 띈다.
1994.06.16. x세영. 2022.03.23.
나보다 한 달 남짓 먼저 태어난 예쁘장한 너는 무슨 사연으로 저리 일찍 떠났을까.
내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죽음엔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여러 번 일어난다. 그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난다 해서 억울해할 이유 없다.
세상엔 슬픔이 많고 나도 예외는 아닌 거야.
나의 죽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는 아빠를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아빠가 나와 계속 함께였으면 좋겠는데,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근데 고통만이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그러니 차라리 아빠가 편히 쉬었으면 하다가도, 이런 소망을 품는 난 못된 딸이 된 것 같았다.
난 괜찮은데. 가끔 한없이 슬프고 깜깜히 무섭지만 견딜만해. 무진장 슬퍼지면 한참 펑펑 울지 뭐. 그래도 안 되겠으면 사후세계 같은 거 좀 믿어보지 뭐. 근데 내가 가장 걱정 되는 건, 아빠가 무서워하고 있을까 봐. 겉으론 티 안 내지만 속으론 무지 두려울까봐. 운명을 피하고 싶은데 이 현실이 야속하기만 할까봐.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타.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단 고통이 별로 없으면 좋겠다. 느린 과정의 혹은 갑작스런 죽음 둘 다 괜찮다. 느리다면 너무 느리진 않았으면 좋겠고, 그동안 인지능력은 온전했으면 좋겠다. 갑작스럽다면 나의 죽음을 인지할 틈 정도는 있다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후자는 남은 이들에게 너무 잔인하다. 적당히 느린 죽음이 가장 좋겠다. 또 언제 죽던지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봉안당에 젊은 이들의 사진이 걸려있을 땐 마음이 아프다. 남은 이들이 내 이루지 못한 삶을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 제법 오래, 살 만큼 살다 죽는 편이 낫겠다[2].
두 번째로, 나의 사람들이 내가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생각 안 했으면 한다.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 따위의 애타는 마음 말이다. 지혜는 분명히 마지막 순간에도 '그래 후회없이 잘 살다 간다!' 라고 했을 거라고, 얜 그랬을 애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날 때까지, 여태 간 모든 이들이 간 그곳으로 갈 때까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삶을 살 거다.
나의 삶
一場春夢
한 일, 마당 장, 봄 춘, 꿈 몽
Life is but a dream. 인생은 한바탕 꿈. 그러니 그냥 마음 편안하게 넉넉히 살아가자,
라고 유튜브에서 어떤 스님이 말씀하셨다.
우린 지금 삶이란 꿈속이고, 죽음이란 이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남이라 생각해 본다.
나 자신을 잘 돌보며 살고 싶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싶다. 되도록 오랜 시간 기쁘고 슬픈 삶을 그들과 함께하고 싶기에.
Postscript
아, 아빠가 진짜로 떠났다.
의료진에게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실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 글을 썼다. 죽음을 이해하면 덜 무섭지 않을까 싶었다. 비록 나의 유일한 결론은 죽음엔 논리가 없다는 것이지만, 죽음이 두렵진 않다. 적어도 지금은. 죽음을 코앞에 마주한 순간에도 두렵지 않을 만큼 편안하고 넉넉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이다.
아빠는 8월 초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길면 3개월, 어쩌면 1개월뿐 남았겠다는 시한부 선고와 함께. 8월 6일 화요일 아침, 공항으로 마중 나온 건강해 보였던 아빠. 그 후 9일 뇌경색, 그리고 실어증이 오기 전까지 그 며칠간 나눈 짧은 대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땐 몰랐지.
떠나기 이틀 전, 짧디짧은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아빠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걱정하지 마, 내 걱정하지 마.'
소중한 두 달을 함께 보내고 아빠는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 만약 영혼이란 게 있다면 부디 평안하길. 가끔 찾아와 인사 한번 하고 가기를.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해.